2018. 3. 31. 20:46ㆍ글/잡소리
대학교 때 뉴미디어를 활용하여 무언가를 기획해 보는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활용한 앱을 기획했고,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기획했던 앱을 간단하게 소개해보자면, 일종의 목표 달성 앱이었다.
[일정 금액의 예치금을 걸어놓고, 목표를 설정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정해놓은 기간 안에 달성하면, 예치금을 돌려받음과 동시에 소정의 포인트를 얻게 된다. 하지만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면 그 예치금은 본인이 설정한 목표와 관계된 곳에 기부가 된다.]는 설정의 앱이었다.
생각해보면 딱히 신선한 아이디어도 아니고, 부가적인 부분을 제외하고는 뉴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아이디어도 아니다. 단지 내가 필요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사실 내에게 ‘너 스스로 정한 목표를 향해 달린적이 있어?’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글쎄? 나는 열심히 하는 거랑 안 맞는 것 같아.’라고 답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유치원, 초중고, 그리고 대학과 군대, 백수인 지금도,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정해놓고, 달려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남들 하는 만큼, 내가 적당히 할 수 있을 만큼만 했다. 운이 좋은 건지, 적당히 살아왔고, 적당히 공부해왔을 뿐인데, 적당히 좋은 대학에 들어가 적당히 졸업을 했다. 물론 거기까지만 적당했다.
적당히 살아도 별 문제가 없던 시기가 지나고 나서야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우울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종종 찾아왔던 손님이었지만, 금방 가버린 반면, 이번 손님들은 꽤 오래 머물렀다. 술을 먹기도 해보고, 혼자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기도하고, 글을 써보기도 했지만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저 나와 같이 있었다.
그렇게 우울이란 손님이 찾아오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나를 마주보게 되었다. 나를 돌아보고 나서야 나는 겁이 났다. 나는 나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겉모습이야 그렇다손치더라도, 성격 역시 그렇게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었다. 낯도 많이 가리고, 쓸데없는 고집도 세고, 솔직하지 못하고, 선택도 잘 못하고, 남들을 배려하며 착한척하지만 실상은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나를 눈앞에 마주하게 되자 더 더욱 내가 좋아지지 않았다.
내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본다 치고, 나는 내가 열심히 하는 것이 무서웠다. 혹여나 실패를 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 때문에 늘 핑계를 만들어왔고 그 중에 가장 만들기 쉬웠던 핑계가 바로 ‘열심이 안 해서 그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늘 쉬운 것만 찾아갔다. 운동보다 더 쉬웠던 공부를, 영어보다 더 쉬웠던 국어를, 이과보다 쉬웠던 문과를 선택한것도 다 열심히 하기 싫어서였고, 실패해서 받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항상 쉽게 성공만하고, 실패의 상처를 피해왔던 것은 아니다. 결국은 몇몇 시도는 실패를 하고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상처를 피하기 위해 그 상처들을 외면하려했던 것 같다. 경쟁에서 지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경쟁자체를 싫어하게 되고, 거절당하는 게 무서워 고백도 피하게 되고, 그렇게 조금씩 겁이 나는 것들을 피해가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은 길들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고, 길을 벗어나자니 또 두렵다. 그래서 나는 지금 길 한가운데 멈춰있다. 한발을 내 딛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그래도 조금씩이라도 저기 어려워 보이는 길들을 향해 걸어가보고자 한다. 가는 동안 처음 밟아보는 길들이 내 발바닥에 상처를 주고, 물집과 굳은살을 주겠지만 그래도 이제는 그 길로 가보고 싶다. 아직 그럴 용기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길 끝이 막혀있더라도, 그 길을 걷는 동안 볼 풍경과 공기와 바람이 기억에 남을 테니, 그러니 나는 이제 가보지 않은 길로도 가보려 한다. 그래서 가는 동안 상처가 생기더라도......... 그래서 이제 나는 ‘열심’이라는 단어와도 조금 친해져 보려한다.